1. 1946 캔자스 — 농구의 고장에서 시카고까지
데이비드 부스는 1946년 12월 캔자스 주 로렌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렌스는 캔자스대(University of Kansas) 가 있는 대학 도시이고, 농구를 만든 제임스 네이스미스가 초대 감독을 지낸 '농구의 고장'이기도 해요. 부스는 이 동네에서 자라 캔자스대에서 경제학 학사와 석사를 마쳤고, 훗날 큰돈을 번 뒤 네이스미스가 손으로 쓴 농구 원조 규칙 원본을 경매로 사서 모교에 기증한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숫자와 시장을 다루는 사람의 뿌리가 화려한 월가가 아니라 캔자스의 대학 동네였다는 점은, 그가 평생 지킨 투자관 — 시장을 맞히겠다는 장담 대신 검증된 연구를 오래 붙드는 것 — 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1969년 그는 박사가 되려고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것이 인생을 바꿨어요. 재무학 수업의 담당 교수가 서른 살의 유진 파마 — 훗날 노벨상을 받는 효율적 시장 가설의 그 파마 — 였고, 부스는 곧 그의 조교가 됩니다. 결국 박사 대신 1971년 MBA 로 방향을 틀어 학교를 나왔지만, 이 교수와 제자의 인연은 반세기 넘게 이어집니다 (출처: Chicago Booth 공식 약력).
2. 1969 시카고 — 파마의 조교, 싱크필드와의 만남
1960년대 말의 시카고대 강의실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가격은 이용 가능한 정보를 이미 반영하고 있다"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 막 형태를 갖추던 시기였고, 그 최전선에서 부스는 파마의 연구를 조교로서 매일 지켜봤어요. 시장을 이기려는 시도 대부분이 비용만 남기고 실패한다는 데이터가 쌓여 가는데, 정작 세상의 펀드는 전부 시장을 이기겠다며 팔리고 있었습니다. 이 간극이 부스가 평생 파고든 사업 기회가 됩니다.
같은 강의실에서 그는 렉스 싱크필드(Rex Sinquefield) 를 만납니다. 세인트루이스의 가톨릭 보육원에서 자라 시카고 MBA(1972) 까지 온 이 동급생 역시 파마의 제자였고, 1970년대에 시카고의 아메리칸 내셔널 뱅크에서 기관용 S&P 500 인덱스 펀드를 가장 먼저 만든 사람 중 하나가 됩니다. 10년 뒤 두 사람은 공동 창업자로 다시 만나요 (출처: Chicago Booth Distinguished Alumni 약력).
3. 1971 웰스파고 — 세계 첫 인덱스 펀드의 현장 실습
MBA 를 마친 부스가 처음 간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웰스파고였습니다. 당시 웰스파고의 경영과학 부서는 시카고학파의 연구를 실제 상품으로 만들어 보려던, 업계에서 거의 유일한 조직이었어요. 부스는 여기서 세계 최초로 꼽히는 인덱스 펀드의 개발 실무에 참여합니다. 강의실에서 배운 "시장을 이기려 하지 말고 시장을 통째로 사라"는 명제가 실제 계좌와 주문으로 바뀌는 과정을 20대 중반에 현장에서 겪은 셈이죠 (출처: Dimensional 공식 약력).
이 경험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덱스 펀드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보글이 1976년 뱅가드에서 개인용 인덱스 펀드를 내놓기도 전에, 부스는 이미 "학술 연구를 운용 상품으로 번역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에요. 보글이 인덱스를 대중화했다면, 부스는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 시장 전체를 사는 것 말고, 연구가 알려주는 것이 더 있지 않을까?
4. 1981 브루클린 — 논문 한 편으로 세운 회사
그 답이 1981년에 나왔습니다. 시카고대 박사과정생 롤프 반즈(Rolf Banz) 가 학위 논문에서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주식 수십 년 치를 분석해, 시가총액이 작은 회사들의 평균 수익률이 큰 회사들보다 높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겁니다. 이른바 '소형주 효과'로, 같은 해 Journal of Financial Economics 에 실렸어요. 문제는 당시 기관 포트폴리오가 대형주 위주라 이 구간을 거의 사지 않았다는 것 — 연구는 있는데 상품이 없었습니다.
부스는 이 논문 하나를 들고 회사를 차립니다. 1981년, 뉴욕 브루클린 브라운스톤 아파트의 남는 방에서 싱크필드와 함께 디멘셔널 펀드 어드바이저스(DFA) 를 세우고, 미국 소형주를 체계적으로 담는 첫 패시브 전략을 내놓았어요. 미국에서 지금까지 운용되는 가장 오래된 소형주 인덱스형 펀드가 이때 태어났습니다. 파마는 창립 때부터 디렉터로 이름을 올렸고요. 강의실의 스승이 이사회에 앉고, 제자가 논문을 상품으로 바꾸는 — 학계와 운용사가 한 몸으로 붙은 구조는 당시로선 처음이었습니다 (출처: Dimensional 공식 연혁 · Banz 1981).
5. 1992 3 팩터 — 학계와 운용 사이의 왕복 운동
DFA 의 진짜 개성은 그다음부터입니다. 1992년 파마가 켄 프렌치와 함께 발표한 3 팩터 모델이 "소형주와 저평가주(장부가 대비 주가가 낮은 주식) 의 초과 수익"을 학술적으로 정리하자, DFA 는 이를 그대로 가치주 펀드 라인으로 옮겼습니다. 2010년대에 수익성(profitability) 이 네 번째 차원으로 학계에서 검증되자 역시 펀드 설계에 반영했고요. 논문이 나오면 상품이 따라 나오는 이 왕복 운동이 40년 넘게 반복된 겁니다. 가치 팩터가 낮은 PBR(주가순자산비율) 을 고르는 일과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떠올리면, 팩터라는 말이 생각보다 소박한 개념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운용 방식도 남달랐습니다. DFA 는 지수를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대신, 팩터 기준에 맞는 종목군을 넓게 들고 매매 시점을 유연하게 가져가는 방식을 씁니다. 지수 편입일에 몰려드는 거래 비용을 피하려는 설계죠. 그리고 판매 채널이 독특했는데 — 광고로 개인에게 직접 파는 대신, 교육을 이수한 재무 자문사를 통해서만 펀드를 공급했습니다. 시장이 급락할 때 고객이 겁에 질려 환매하면 전략이 망가지니, 고객을 붙들어 줄 사람을 사이에 둔 거예요. 패시브와 액티브의 경계에서 보자면 DFA 는 딱 그 중간 — 시장을 예측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패시브, 지수를 그대로 베끼지 않는다는 점에선 액티브 — 에 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6. 2008 이름이 된 기부, 2026 1조 달러
2008년 부스는 모교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에 3억 달러를 기부합니다. 당시까지 세계 어느 경영대학원도 받아 본 적 없는 규모였고, 학교는 이름을 '부스 스쿨 오브 비즈니스'로 바꿨어요. 파마의 조교였던 학생이 40년 뒤 그 학교의 이름이 된 겁니다. 부스 본인은 이 기부를 회사의 근간이 된 아이디어에 대한 보답으로 설명했습니다 — 시카고의 연구가 없었다면 DFA 도 없었다는 거죠 (출처: University of Chicago News, 2008).
회사는 그 뒤로도 계속 자랐습니다. 2020년부터는 뮤추얼 펀드를 ETF 로 대거 전환하며 미국 최대 액티브 ETF 운용사가 됐고, 2026년 2월에는 전 세계 운용자산이 1조 달러를 넘어섰다고 발표했어요 (2025년 말 기준 9,440억 달러). 2026년 6월에는 약 2,500억 달러 규모 펀드를 ETF 병행 구조로 통합하면서 보수를 자산 가중 평균 9% 내리겠다고 밝혔습니다. 브루클린의 남는 방에서 시작한 회사가 45년 만에 도달한 자리입니다 (출처: Dimensional 공식 발표 2026.2 · 2026.6).
7. 남긴 것 — "위대한 아이디어는 작게 시작한다"
부스는 새 이론을 만든 학자가 아닙니다. 반즈의 소형주도, 파마-프렌치의 가치도 그의 발견이 아니에요. 그가 한 일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 검증된 연구를 남보다 먼저 믿고, 그것이 실제 계좌에서 작동하도록 펀드 구조·매매 방식·판매 채널까지 통째로 설계한 것. 예측을 팔지 않는 운용사가 1조 달러를 모을 수 있다는 증명 자체가 그의 작품입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 "위대한 아이디어는 대개 작은 아이디어로 시작하고, 그 위에 쌓아 가는 것이다"(Morningstar 인터뷰). 브루클린의 남는 방과 논문 한 편이 그 작은 시작이었습니다.
개인 투자자가 부스에게서 가져갈 것은 팩터 공식 자체보다 태도에 가깝습니다. 소형주든 가치주든 어떤 구간의 초과 수익도 몇 년씩 사라진 듯 보이는 시기를 지나는데, DFA 는 그때마다 전략을 바꾸는 대신 버텼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애초에 "왜 이 프리미엄이 존재하는가"를 연구로 납득하고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근거 없이 산 것은 흔들릴 때 팔게 되고, 근거를 알고 산 것은 버틸 수 있다 — 분산의 기본을 배우는 초보 투자자에게도, 수익률이 밋밋한 해를 지나는 인덱스 투자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같은 정량 진영에서 정반대의 길 — 초단기 패턴으로 시장을 이기는 길 — 을 간 짐 시몬스의 메달리온과 나란히 놓고 보면, '데이터로 투자한다'는 말이 얼마나 다른 두 세계를 가리킬 수 있는지도 보이고요.
8. 출처
이 글의 사실 관계는 다음 1차 자료를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① Chicago Booth "About David Booth" 공식 약력 · Distinguished Alumni 약력 (부스·싱크필드의 학력과 이력), ② University of Chicago News (2008.11, 3억 달러 기부와 부스 스쿨 명명), ③ Dimensional Fund Advisors 공식 뉴스룸 — 창업 연혁, 2026년 2월 운용자산 1조 달러 달성 발표, 2026년 6월 ETF 병행 구조 통합·보수 9% 인하 발표, ④ Rolf W. Banz, "The Relationship Between Return and Market Value of Common Stocks", Journal of Financial Economics (1981), ⑤ Morningstar 인터뷰 "Usually the Great Ideas Start Out as Small Ideas". 수치는 발표 시점 기준이며, 운용자산은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