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시에 올 수 없다던 두 가지
스태그플레이션은 침체(stagnation)와 물가 상승(inflation)을 합친 말입니다. 경기가 가라앉아 실업이 느는데 물가까지 오르는, 한쪽만 와도 골치 아픈 두 가지가 한꺼번에 닥치는 상황이에요. 1970년대 전까지 경제학자들은 이걸 거의 불가능한 조합으로 봤습니다. 필립스 곡선이라는 관찰 때문이었는데, 1958년 A.W. 필립스가 영국 데이터에서 찾아낸 이 곡선은 물가와 실업은 시소처럼 반대로 움직인다고 말했거든요. 경기를 띄워 실업을 줄이면 물가가 오르고, 물가를 잡으려 경기를 누르면 실업이 는다 — 둘 중 하나는 골라야 하는 트레이드오프라는 거죠.
그런데 1970년대 미국에서 그 시소가 부서졌습니다. 물가도 오르고 실업률도 오르는, 곡선이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몇 년씩 이어진 거예요. 교과서가 현실에 깨진 순간이었고, 이게 이후 통화정책의 사고방식을 통째로 바꿔 놓습니다.
2. 방아쇠 — 두 차례의 오일쇼크
가장 직접적인 불씨는 석유였습니다. 1973년 10월 욤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OPEC이 감산·금수에 나서자 배럴당 3달러 안팎이던 원유가 1년 새 12달러 부근까지, 약 네 배로 뛰었어요. 석유는 거의 모든 생산의 원가에 깔려 있으니 기름값 폭등은 전 품목의 물가를 동시에 밀어 올렸고, 동시에 비싸진 에너지가 생산을 위축시켜 경기를 끌어내렸습니다. 물가와 침체가 같은 충격에서 함께 나온 셈이죠.
이게 바로 공급 충격의 특성입니다. 수요가 과열돼 생긴 인플레는 금리를 올려 수요를 식히면 되지만, 공급이 막혀 생긴 인플레는 금리를 올리면 가뜩이나 약한 경기를 더 죽일 뿐 물가는 잘 안 잡혀요.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두 번째 오일쇼크가 오자 원유가 다시 두 배 넘게 뛰면서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1980년 약 13.5%까지 치솟았습니다 — 그 사이 실업률도 내내 높았고요.
3. 불씨를 키운 것 — 느슨한 통화정책과 기대
오일쇼크만으로 10년을 설명할 순 없습니다. 학계가 더 무겁게 보는 건 그 충격을 떠받친 통화정책이에요. 1971년 닉슨이 달러의 금 태환을 정지하며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진 뒤, 화폐 발행을 묶어 두던 금의 족쇄가 풀렸습니다. 당시 연준은 실업을 줄이라는 정치적 압력 속에서 기준금리를 낮게 둔 채 돈줄을 너무 오래 느슨하게 풀었고, 그게 물가 상승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어요.
여기서 핵심 개념이 '인플레이션 기대'입니다. 사람들이 "내년에도 물가가 오를 것"이라 믿기 시작하면, 노동자는 미리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고 기업은 미리 가격을 올려 기대가 현실을 만드는 악순환이 돌아가요. 밀턴 프리드먼과 에드먼드 펠프스는 1960년대 후반에 이미 "필립스 곡선의 트레이드오프는 단기에만 통하고, 기대가 조정되면 사라진다"고 경고했는데, 1970년대가 그 말을 증명한 셈입니다. 한 번 풀린 기대를 다시 묶는 게 얼마나 비싼지는, 같은 통화 신뢰의 문제를 극단으로 보여준 바이마르 초인플레이션과 결을 같이 합니다.
4. 어떻게 끝났나 — 그리고 무엇을 남겼나
결국 이 진퇴양난을 깬 건 고통을 감수한 정면 돌파였습니다. 1979년 취임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금리를 20% 가까이 끌어올리는 초긴축으로 물가를 잡으러 들어갔고, 두 차례의 깊은 경기 침체와 10%를 넘긴 실업을 대가로 1983년 인플레이션을 3%대로 끌어내렸어요. 물가 기대를 부러뜨리려면 경기를 죽일 각오까지 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 값비싼 마침표였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남긴 교훈은 지금도 통화정책의 뼈대입니다. 중앙은행이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못 박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플레이션 기대가 풀리기 전에 선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 오늘날 연준과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원칙의 상당수가 이 10년의 학습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2020년대 들어 물가가 다시 튀었을 때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라는 말이 그렇게 빨리 튀어나온 것도, 시장이 이 사이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출처
- U.S. Bureau of Labor Statistics (BLS) — Consumer Price Index·실업률 시계열 1970~1982 (1974 약 11%, 1980 약 13.5% / 실업률 1975·1982 정점)
- NBER — U.S. Business Cycle Expansions and Contractions (1973-11~1975-03, 1980, 1981-07~1982-11 침체 연표)
- Federal Reserve History — "The Great Inflation 1965–1982" (federalreservehistory.org)
- Milton Friedman (1968) — "The Role of Monetary Policy" · American Economic Review (자연실업률·기대 가설)
- A.W. Phillips (1958) — "The Relation between Unemployment and the Rate of Change of Money Wage Rates" · Econom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