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IMF 11개월 전, 첫 도미노가 쓰러지다
한보 부도는 1997년 1월 23일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주력사 한보철강이 5조 원의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 사건으로, 그해 11월 한국을 IMF 외환위기로 몰고 간 부도 도미노의 첫 조각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한 기업의 실패로 여겼어요. 하지만 한보가 무너진 자리에서 드러난 두 가지 — 자기 돈 없이 빚으로만 쌓아 올린 공장, 그리고 그 빚을 가능하게 한 정경유착 — 은 한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1990년대 한국 경제 전체의 환부였습니다. 이번 화는 위기가 터지기 전에 이미 울리고 있었던 첫 경보음의 이야기입니다.
2. 코렉스의 꿈, 차입의 덫
한보철강의 야심은 충남 당진의 제철소였습니다. 정태수 회장은 용광로 없이 쇳물을 뽑는 신공법 '코렉스'를 앞세워 포항제철에 맞설 일관제철소를 짓겠다고 나섰어요.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설계 변경을 거듭하며 투자 규모가 5조 7,000억 원까지 불었는데, 그 자금의 약 90%를 은행 차입으로 메웠습니다. 자기 돈은 거의 없이 빌린 돈으로만 거대한 공장을 세운 거예요.
이건 한보만의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10대 재벌은 부채비율이 500%를 넘나들었어요 — 자기자본의 다섯 배가 넘는 빚으로 굴러갔다는 뜻입니다. 호황이 이어지는 한 빚은 성장의 연료였지만, 매출이 조금만 흔들려도 이자조차 감당 못 하는 구조였습니다. 한보는 그 위태로운 모델의 가장 극단적인 표본이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부러졌어요. 빚으로 키운 몸집이 위기에 어떻게 무너지는지는 바로 다음 사건인 대우 사태에서 더 큰 규모로 반복됩니다.
3. 빚을 가능하게 한 검은 고리
알맹이 없는 기업이 5조 원을 빌릴 수 있었던 비결은 따로 있었습니다. 정경유착이었어요. 한보가 천문학적 대출을 받는 과정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과의 유착이 작동했다는 정황이 부도 직후 드러났습니다. 은행의 대출 심사가 기업의 상환 능력이 아니라 정치적 입김으로 움직였던 거예요. 부도 석 달 뒤인 1997년 4월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열렸고,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검찰에 소환됐으며 김현철은 결국 구속됐습니다.
이 대목이 한보 부도를 단순한 경영 실패와 가르는 지점입니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보다, 갚을 능력을 따지지 않고 빌려준 시스템이 더 큰 문제였어요. 은행이 정치 논리로 부실 기업에 돈을 쏟아부으면, 그 부실은 결국 금융 시스템 전체의 부실로 옮아갑니다. 도덕적 해이가 기업과 정치, 금융을 한 줄로 꿰고 있었던 셈이에요.
4. 한 조각이 쓰러지자 줄줄이
한보가 신호탄이었습니다. 1997년 한 해 동안 대형 부도가 도미노처럼 이어졌어요 — 3월 삼미, 4월 진로, 5월 대농·한신, 그리고 7월에는 재계 8위 기아자동차까지 무너졌습니다. 11월에는 해태와 뉴코아가 쓰러졌고, 바로 그달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합니다. 개별 기업의 부도가 은행의 부실채권으로 쌓이고, 그 부실이 금융권 전체의 신뢰를 갉아먹으면서, 외국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외환위기로 번진 거예요.
5. 첫 경보음을 무시한 대가
돌아보면 1997년 1월의 한보 부도는 분명한 경보음이었습니다. 차입경영과 정경유착이라는 한국 경제의 두 환부가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정부도 시장도 이것을 '부실기업 하나의 문제'로 처리하려 했고, 그 사이 똑같은 구조를 가진 기업들이 차례로 쓰러지며 위기는 손쓸 수 없이 커졌습니다. 위기가 11월에 폭발했을 때, 사실 도화선은 이미 1월에 타들어 가고 있었던 거예요.
한보가 비싸게 가르친 것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큰 위기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건 그냥 개별 사건"이라고 넘긴 첫 신호에서 자란다는 것입니다. 시장이 한 기업의 부도를 두고 '예외적 사고'라 부를 때, 정작 봐야 할 것은 그 기업이 쓰러진 이유가 그 기업만의 것인지예요. 한보를 무너뜨린 과잉 차입과 부실 대출은 그때 이 나라 기업 대부분이 공유한 체질이었고, 그래서 첫 도미노는 결코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개별 사건처럼 보이는 첫 균열에서 구조를 읽어 내는 눈 — 그것이 한보가 가장 비싼 값으로 가르친 투자자의 감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