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계 2위가 사라진 날
대우 사태는 1999년 7월 자산 기준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의 12개 계열사가 일제히 채권단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빚을 지렛대로 몸집을 키우는 한국식 '차입경영'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린 사건입니다. 1967년 자본금 500만 원의 무역회사로 출발해 32년 만에 41개 계열사를 거느린 제국이 됐지만, 그 성장을 떠받친 것이 자기 돈이 아니라 89조 원의 부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어요. 당시 정부 한 해 예산이 84조 원이었으니, 한 기업의 빚이 나라 살림을 넘어선 셈입니다. 이번 화는 외환위기가 끝나 가던 무렵 한국 경제가 치른 가장 큰 구조조정의 이야기입니다.
2. 세계경영 — 빚으로 쌓아 올린 제국
김우중 회장의 대우는 '세계경영'이라는 깃발 아래 1990년대 내내 폭주하듯 팽창했습니다. 1993년 세계경영을 공식 선포한 뒤 동유럽·중앙아시아·아프리카까지 공장을 세우며 해외 법인만 수백 개로 불렸어요. 문제는 그 확장의 연료였습니다. 대우는 벌어들인 돈이 아니라 빌린 돈으로 자랐고, 그 결과 부채비율이 다른 대기업을 압도하는 수준까지 치솟았습니다. 호황기에는 이 차입경영이 경쟁사를 앞지르는 가속 페달이었지만, 돈줄이 마르는 순간 똑같은 부채가 그룹을 짓누르는 족쇄로 바뀌는 구조였어요.
1997년 외환위기가 그 순간을 앞당겼습니다. 금리가 치솟고 은행이 대출을 조이자, 빚으로 굴러가던 대우의 엔진은 연료가 끊겼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오히려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며 대우자동차를 앞세운 확장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 '대마불사(too big to fail)' 식 베팅 — 그룹이 너무 커서 정부가 망하게 두지 않으리라는 기대 — 이 사태를 더 키웠다는 것이 훗날의 평가입니다.
3. 빅딜과 워크아웃 — 정부가 칼을 들다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는 재벌 개혁을 핵심 과제로 내걸었습니다. 1998년 12월 7일 대통령 주재 정·재계 간담회에서 5대 그룹은 계열사를 264개에서 130개로 줄이고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맞추겠다고 발표했어요. 이른바 '빅딜'이라 불린 사업 교환과 구조조정이 이때 본격화됐습니다. 대우는 이 흐름 속에서 1998년 41개 계열사를 10개로 줄이겠다는 자구안을 내놨지만, 빚을 갚을 현금이 들어오지 않는 한 숫자놀음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 동아줄은 대우자동차였어요. 미국 GM 과의 합작으로 자금을 수혈받으려 했지만 협상이 무산되면서 기대가 꺾였고, 1998년 말 유동성 위기가 현실이 됐습니다. 결국 1999년 7월, 채권단은 대우 12개 계열사를 워크아웃 대상으로 지정합니다. 그룹 차원의 자율적 회생이 아니라 채권단이 운전대를 넘겨받는 강제 구조조정 — 사실상 해체의 시작이었어요. 1993년 세계경영을 선포한 지 꼭 6년 만이었습니다.
4. 41조 분식, 그리고 회장의 도피
해체 과정에서 드러난 장부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1997~1998년에 걸쳐 약 41조 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됐는데, 이는 부실을 가린 회계 조작으로는 사상 최대였어요. 멀쩡해 보이던 재무제표 뒤에서 부실이 곪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1999년 해외로 출국한 뒤 5년 넘게 돌아오지 않다가 2005년 귀국했고, 2006년 징역 8년 6월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다만 1년 남짓 복역한 뒤 2008년 특별사면됐고, 천문학적 추징금은 대부분 환수되지 못했어요.
기업을 살리는 데 들어간 돈은 국민의 몫이었습니다. 대우 정상화에 투입된 공적자금만 30조 원에 달했습니다. 빚으로 키운 제국이 무너진 자리를, 결국 세금이 메운 셈이에요.
5. 대마불사 신화가 무너진 자리
대우의 해체가 한국 경제에 남긴 가장 큰 흔적은 '너무 커서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의 붕괴였습니다. 그때까지 대기업은 위기에 몰려도 정부가 어떻게든 살려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재계 2위 대우조차 해체되는 걸 보며 그 믿음은 깨졌어요. 동시에 부채비율을 무기로 몸집을 불리는 차입경영 모델도 종언을 고했습니다. 빅딜과 200% 부채비율 규제를 거치며 한국 대기업의 재무 구조는 이전과 전혀 다른 체질로 바뀌었습니다.
대우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쪼개진 계열사들은 대우인터내셔널·대우건설·대우조선해양·대우증권 같은 독립 기업으로 살아남아 다른 주인을 만났고, 일부는 지금도 그 이름을 일부 쓰고 있어요. 제국은 해체됐지만 그 조각들은 한국 산업 곳곳에 흩어져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대우가 던지는 질문은 성장의 속도가 아니라 성장의 연료에 관한 것입니다. 같은 매출, 같은 외형이라도 그것을 자기 돈으로 일궜는지 빌린 돈으로 부풀렸는지는 위기가 와야 비로소 갈립니다. 호황기의 화려한 외형에 가려진 부채비율이야말로 기업을 볼 때 가장 먼저 들춰 봐야 할 숫자라는 것 — 재계 2위의 32년을 6년 만에 지운 이 사건이 투자자에게 남긴 가장 오래가는 경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