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50억짜리 약속
이야기는 2020년의 평범한 자금 조달에서 시작합니다. 강원도 춘천에 레고랜드 테마파크를 짓던 시행사 강원중도개발공사(GJC)는 공사비를 마련하려고 특수목적회사(SPC) '아이원제일차'를 세웠고, 이 SPC가 BNK투자증권 주관으로 2,050억 원어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했어요. 투자자들이 이 어음을 의심 없이 사 간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 강원도가 지급보증을 섰거든요. 시행사가 못 갚으면 도(道)가 대신 갚는다는 약속. 한국 채권시장에서 지방자치단체의 보증은 국가 신용의 연장선으로 통했고, 그래서 이 어음은 신용평가 최상위 등급(A1)을 달고 팔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전국 어디에나 있는 구조입니다. 지자체가 보증한 개발사업 어음은 시장에 수두룩했고, 그 누구도 "지자체가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어요. 그 질문이 필요 없다는 것이 이 시장의 토대였으니까요.
2. 9월 28일, "그 보증, 이행하지 않겠습니다"
2022년 9월 28일,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내용은 간단했어요 — GJC가 빌린 2,050억 원을 도가 대신 갚는 사태를 막기 위해 GJC 에 대해 기업회생을 신청하겠다, "도가 안고 있는 2,050억 원의 보증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다. 전임 도정의 사업 부담을 정리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채권시장이 들은 메시지는 달랐습니다. 지자체가 보증을 안 설 수도 있구나.
바로 다음 날인 9월 29일이 하필 이 ABCP 의 만기일이었습니다. 어음은 만기를 넘겼고, 10월 5일 최종 부도 처리됐어요. 금액만 보면 강원도가 마음먹으면 감당할 수 있는 규모였고 실제로 두 달여 뒤 전액 상환됩니다. 그런데 시장이 무너진 건 돈이 아니라 전제였습니다. "의심할 필요 없던 약속"이 의심의 대상이 된 순간, 같은 구조로 발행된 전국의 부동산 PF ABCP 와 기업어음 전체가 한꺼번에 재평가 대상이 됐거든요.
3. 2,050억이 수백조를 흔든 경로
전염은 단기자금시장의 구조를 타고 번졌습니다. 기업과 증권사들은 만기가 짧은 어음을 새 어음으로 갈아타며(차환) 자금을 돌리는데, 투자자들이 "지자체 보증도 못 믿는데 부동산 PF 어음을 어떻게 믿나"라며 일제히 지갑을 닫자 차환 자체가 멈춰 버렸어요. 마침 그해는 글로벌 긴축으로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던 해라, 불씨가 떨어진 곳이 이미 바싹 마른 들판이기도 했습니다.
숫자가 그 공포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연초 연 1.54%였던 A1급 CP(91일물) 금리는 10월 24일 4.37%, 11월 7일에는 4.94%까지 치솟았는데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1월 이후 13년 10개월 만의 최고치였어요(금융투자협회 집계). 회사채(AA-, 3년물) 금리도 10월 21일 5.736%로 연중 고점을 찍었습니다. 금리가 시장의 체온이라면, 이 가을의 채권시장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던 셈이에요. 금리가 오른다는 게 채권 가격과 자금 조달에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금리의 기초에서 차분히 다뤘습니다.
4. 50조, 95조 — 불을 끄는 데 든 비용
진화는 사태의 크기를 역으로 증명했습니다. 10월 11일 강원도가 "연내 변제하겠다"며 입장을 바꿨지만 한번 식은 시장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10월 23일 일요일에 부총리·한국은행 총재·금융위원장이 모인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가 열립니다. 결과가 그 유명한 '50조 원+α' 유동성 공급이에요(기획재정부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 10월 23일).
| 대책 | 규모 | 내용 |
|---|---|---|
| 채권시장안정펀드 | 20조 원 | 10월 24일부터 CP 등 매입 가동 |
|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 | 8조 → 16조 원 | 산업은행·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 한도 2배 확대 |
| 증권사 유동성 지원 | 3조 원 | 한국증권금융 — PF-ABCP 차환 막힌 증권사 대상 |
| 5대 금융지주 (11/1) | 95조 원 | 연말까지 유동성·자금 지원 — 정부 대책과 별도 |
그리고 12월 12일, 강원도는 예고한 12월 15일 시한을 사흘 앞두고 2,050억 원 보증채무를 전액 상환했습니다. 김진태 지사는 "문제 많던 GJC 보증채무가 오늘로 완전히 정리됐다"고 발표했어요. 처음부터 갚을 수 있는 돈이었고 결국 갚은 돈입니다. 그 사이에 시장이 치른 청구서만 백수십조 원 규모의 안정화 자금과, 차환에 실패해 흔들린 수많은 사업장으로 남았습니다.
5. 가장 싼 위기, 가장 비싼 수업
한국 금융사 시리즈에서 다뤄 온 위기들과 나란히 놓아 보면 이 사건의 자리가 또렷해집니다. IMF 외환위기는 외부 충격이 구조적 취약점을 때린 사건이었고, 키코 사태는 계약서 안에 숨어 있던 비대칭이 터진 사건이었어요. 레고랜드는 둘과 다릅니다. 부실도, 복잡한 파생 구조도 아니고 말 한마디가 트리거였습니다. 시장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약속이 깨질 수 있다는 가능성 — 그것만으로 수백조 원짜리 시장이 멈출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거예요.
그래서 이 사건이 남긴 교훈은 재정 건전성보다 신용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신용은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고, 믿음은 가장 단단해 보이는 곳에서 깨질 때 가장 멀리 번집니다. 채권시장의 다음 위기가 온다면 그 트리거도 아마 모두가 주시하던 대형 부실이 아니라, 아무도 의심해 본 적 없던 어떤 약속일 가능성이 높아요. 투자자가 이 사건에서 챙길 건 하나입니다 — 내 자산의 안전이 어떤 '당연한 전제' 위에 서 있는지, 그 전제를 가끔은 소리 내어 확인해 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