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지처럼 보이던 비대칭 옵션
키코는 사실 한 단어가 아니라 두 단어의 약어입니다. Knock-In(약정 환율보다 일정 폭 위에 정해진 상단 장벽) 과 Knock-Out(약정 환율보다 일정 폭 아래에 정해진 하단 장벽) 의 머리글자를 딴 옵션 구조였어요. 환율이 두 장벽 사이에 머무는 동안에는 수출기업이 미리 약속한 약정 환율에 보유한 달러를 팔 수 있게 되어 있어 — 가령 약정 환율 940원, 시장 환율 920원이면 한 달러당 20원을 벌게 되는 식 — 마치 환율 하락 위험을 깔끔하게 막아 주는 보험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옵션을 매수하면서 내는 프리미엄도 거의 0원에 가까웠어요. 환헤지 비용이 사실상 공짜였던 셈입니다.
문제는 두 장벽을 벗어나는 순간 손익이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된다는 데 있었습니다. 환율이 하단 Knock-Out 아래로 빠지면 계약 자체가 그 결제일에 그냥 사라져 버려요. 막고 싶었던 원화 강세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정작 헤지가 작동을 멈춰 버리는 구조였던 거예요. 반대로 환율이 상단 Knock-In 을 뚫고 오르면 약정 환율로 팔아야 하는 달러의 양이 한 번에 두 배 또는 그 이상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수출로 들어온 달러는 100만 달러뿐인데 계약상 200만 달러를 약정 환율에 팔아야 하니 부족분 100만 달러를 환율이 폭등한 시장에서 비싸게 사다가 헐값에 넘겨야 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매도 손실이 환율 상승 폭에 비례해 무한정 커지는 일방통행 옵션이었던 셈입니다.
2. 왜 그렇게 많이 팔렸는가
이 비대칭이 그렇게 위험한데도 팔렸던 이유는 2007년 한국의 시장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어요. 원/달러 환율은 2007년 한 해 동안 900원대 초반에서 안정적으로 움직였고, 외환 보유고 2,600억 달러 + 무역수지 흑자라는 거시 조건 위에서 「원화는 앞으로 더 강해진다」 는 컨센서스가 굳어져 있었습니다. 수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1년 뒤 받을 달러가 더 헐값이 될까 봐 막연한 불안이 컸고, 그 불안을 거의 비용 없이 막아 준다는 상품이 등장한 거예요. 한국금융연구원이 2009년에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6월 기준으로 519개 회사가 키코 옵션을 100.1억 달러어치 보유하고 있었고, 이 가운데 480개사가 중소기업이었으며 그들 몫만 75억 달러였습니다.
은행 입장에서도 키코는 매력적인 상품이었습니다. 옵션 프리미엄 자체는 거의 0원이었지만, 약정 환율 위에서 옵션이 행사되면 은행이 약정 환율에 달러를 사들이는 쪽이라 환율이 오르면 대규모 차익이 났어요. 즉 박스권 안에서는 적당히 무난하고, 박스를 깨고 환율이 오르면 거꾸로 큰 이익이 나는 비대칭 — 그 거울 반대편에서 손실 무제한을 떠안는 게 수출기업이었던 셈입니다. 13개 은행(외국계 3곳 포함) 이 1,047건의 키코 계약을 판매했고, 이 가운데 30~60%의 기업이 손실을 감당하지 못해 워크아웃이나 폐업으로 내몰린 통계가 그 비대칭의 결과입니다.
3. 약속이 부메랑이 된 가을
2008년 9월 15일 리먼 브라더스 파산은 한국 외환시장의 안전판을 한 번에 무너뜨렸어요. 외국인 자금이 코스피와 채권 시장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9월 한 달 동안 원/달러는 1,089원에서 1,192원으로 +9.5%, 10월에는 다시 1,326원까지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11월 21일에는 일중 1,525원까지 솟구치며 한 해 안에 원화가 약 25% 약세를 보였어요. 키코 계약 안에서는 환율이 매 결제일마다 평가되도록 설계돼 있었기 때문에, 매월 약정 환율과 시장 환율의 격차만큼 손실이 누적됐고 그 손실은 약정의 두 배 분량에 대해 계산됐습니다. 평균 약정 환율 940원짜리 계약을 보유한 기업은 결제일 시장 환율이 1,300원이면 한 달러당 약 360원의 손실에 그 두 배 분량까지 곱해진 금액을 매월 은행에 송금해야 했어요.
이 손실이 회사 규모를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2009년 한국 산업계에서는 「수출은 분명히 잘되고 있는데 회사는 무너지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환율 상승은 수출기업에 호재인데도 키코 손실 때문에 영업이익보다 큰 파생상품 평가 손실이 재무제표에 잡혔고, 그 손실이 신용 등급을 깎으면서 은행 단기차입이 막혀 흑자도산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줄을 이었어요. 정부는 2009년 1월 금융위원회·중기청·금감원 합동 대책반을 가동해 키코 계약을 맺은 11개 은행 전체를 현장 점검했고, 그 과정에서 「불완전 판매」 가 광범위하게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손익 시뮬레이션 자료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거나, 환율이 약정 박스를 벗어났을 때의 손실 규모를 추정 화면조차 보여 주지 않은 사례가 다수였어요. 비교를 위해 같은 시기 글로벌 위기를 다룬 2008 글로벌 금융위기 — 서브프라임의 폭발 글을 함께 읽으면 키코가 단순히 한국만의 사고가 아니라 그 시기 전 세계 은행권이 위험 상품을 어떻게 비전문가 고객에게 판매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는 점이 더 또렷해집니다.
4. 11년의 법정 공방과 평균 23%의 배상
1차 소송이 시작된 2008년 12월부터 200건이 넘는 소송이 13개 은행을 상대로 제기됐습니다. 대표적으로 외국계 은행이었던 스탠다드차타드·씨티·HSBC 도 피고에 포함됐어요. 한국 법원에서 다투어진 쟁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 키코 계약 자체가 약관규제법상 「불공정 약관」 또는 「사기성 거래」 에 해당하는가, 그리고 은행이 충분한 설명 의무를 다하지 않은 「불완전판매」 가 있었는가. 2013년 9월 2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4개 기업(세신정밀·수산중공업·모나미·삼코) 의 핵심 사건에서 첫 번째 쟁점은 부인했습니다. 키코는 약정 환율과 옵션 프리미엄을 등가로 교환한 「적법한 옵션 계약」 이라는 판단이었어요. 다만 두 번째 쟁점에서는 일부 은행의 설명 의무 위반을 인정했고, 사건별로 5~50% 범위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결정은 2019년 12월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에서 나왔어요. 대법원 판결 6년 뒤 4개 피해 기업에 대해 금감원이 평균 23%, 구체적으로는 원글로벌미디어 41%(42억 원)·남화통상 20%(7억 원)·재영솔루텍 15%(66억 원)·일성하이스코 15%(141억 원) 의 배상 비율을 제시했습니다. 강제력은 없는 권고였지만, 신한은행이 약 150억 원, 우리은행 42억 원, 산업은행 28억 원 배상에 동의하면서 일부 화해가 이뤄졌어요. 정확히 같은 1,047건 계약 전체에 적용된 결과가 아니라 분쟁 조정 신청서를 넣은 일부 기업에 한정된 결과였기 때문에, 키코 피해 기업들이 사고 11년이 지나도록 추가 소송과 협상을 이어 가는 배경이 됐습니다. 환율 변동성과 자산 가격이 사람의 일상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관심이 있다면 투자 입문 — 분산투자의 기본 글에서 한 자산·한 통화에 노출되는 위험을 어떻게 일상 단위에서 관리하는지 함께 읽어 보세요.
5. 정리 — 비대칭은 늘 비용을 한쪽에 쌓는다
키코가 한국 금융사에 남긴 가장 큰 교훈은 「프리미엄이 거의 0원인 옵션」 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 것이었습니다. 프리미엄이 0에 가깝다는 건 둘 중 하나예요. 옵션을 사는 쪽과 파는 쪽이 정말로 동등한 위험을 주고받는 경우거나, 어딘가의 비용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경우. 키코는 두 번째였습니다. 환율이 박스권에 머무를 확률은 높지만 한번 박스를 깨면 그 위쪽 손실이 무제한으로 열려 있는 — 평소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일어나면 회사를 통째로 가져가는 「꼬리 위험」 이 모든 비용을 한쪽 거래자에게 쌓아 두고 있었어요. 2009년 이후 한국 금융감독 당국은 비예금성 외환 파생상품에 대해 「적합성 의무」 와 「설명 의무」 를 강화하고, 중소기업의 환헤지는 단순 선물환·통화선물 등 손익 구조가 대칭인 상품으로 가이드라인을 다시 짰습니다.
다음 편 레고랜드 사태 2022 — 지자체 보증의 신뢰 붕괴 에서도 같은 패턴이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정상 시기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비대칭이 위기의 한순간에 모든 비용을 한쪽에 몰아붙이는 모습 — 한국 금융사 안에서 반복되는 이 구조가 어떻게 또 한 번 시장을 흔들었는지 함께 따라가 보면 좋습니다. 머니스쿱 라이브러리에서 이런 비대칭 구조를 학습할 때 옵션·파생상품·헤지 같은 핵심 개념을 글로서리에서 한 번 더 따라가 보면 같은 사고를 반복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됩니다.
출처
- 한국금융연구원 "KIKO 관련 주요이슈와 경제적 함의" KIF Working Paper (2009)
-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 결정문 — 2019.12.13 「KIKO 분쟁조정 결과」
- 대법원 2013. 9. 26. 선고 2012다13637 전원합의체 판결 — 부당이득금반환등 (국가법령정보센터)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 — 2008년 원/달러 매매기준율 일별·월별 통계
- Khil J., "Risk Management Lessons from KIKO Option Disaster," Asia-Pacific Journal of Financial Studies (Wiley,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