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DB와 DC의 갈림길 — 운용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
퇴직연금 기초 편에서 DB·DC·IRP 세 갈래를 훑었다면, 이 글은 DC형 안쪽을 깊이 들여다봅니다. DB형(확정급여형)은 회사가 적립금을 굴리고 퇴직 시 「퇴직 전 3개월 평균임금 × 근속연수」로 정해진 금액을 보장합니다. 잘 굴리든 못 굴리든 약속한 돈은 나와요. 반면 DC형은 회사가 매년 연간임금총액의 1/12 이상을 근로자 개인 계좌에 넣어 주면, 그 이후는 근로자 본인이 알아서 굴리는 구조입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납입 의무만 다하면 운용 위험이 없으니 좋고, 근로자 입장에서는 잘 굴리면 DB보다 훨씬 더 큰 퇴직급여를 만들 수 있어요. 물론 반대도 성립합니다. 못 굴리면 원금만 겨우 건지는 상황도 벌어지죠. 이 「자유와 책임의 교환」이 DC형의 본질이에요. 2024년 말 DC형 적립금은 118.4조 원으로 전체 퇴직연금 431.7조 원의 약 2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 위험자산 70% 한도 — 나머지 30%는 안전자산
DC형 계좌에서 마음대로 100% 주식에 넣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퇴직연금감독규정이 위험자산 투자 한도를 70%로 묶어 놓았어요. 나머지 30% 이상은 원리금보장상품(정기예금, 이율보증보험 등)이나 국채 같은 안전자산으로 채워야 합니다. 주식형 펀드, 혼합형 펀드, ETF, TDF 등이 위험자산으로 분류되고, 개별 상장주식 직접 투자는 아직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30% 룰이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20~30대 직장인이라면 은퇴까지 30년 넘게 남았는데 안전자산 30%를 강제로 유지해야 하니까요. 반대로 50대 후반이라면 이 룰이 오히려 안전망이 됩니다. 어쨌든 70%까지는 자유롭게 쓸 수 있으니, 그 안에서 60/40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든 TDF에 맡기든 선택의 여지는 넉넉한 편이에요.
3. 디폴트옵션의 역설 — 40조 원의 88%가 초저위험
2022년 7월부터 DC형과 IRP에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 도입됐습니다.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미리 정해 둔 상품으로 자동 운용해 주는 제도인데, 원래 취지는 「방치된 적립금이 예금 이자만 받으며 썩는 걸 막자」는 거였어요. 위험등급 4단계(초저위험·저위험·중위험·고위험)로 나뉘어 있고, 2025년 4월부터 각각 안정형·안정투자형·중립투자형·적극투자형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문제는 현실입니다. 2024년 4분기 기준 디폴트옵션 적립금 40조 원 중 88%인 35.3조 원이 초저위험(원리금보장형)에 쏠려 있어요. 수익률은 연 3.3%입니다. 같은 기간 고위험은 16.8%를 기록했으니 차이가 5배가 넘습니다. 제도는 잘 만들어졌는데 가입자 대부분이 가장 안전한 선택만 하고 있는 셈이에요. 물가 상승률 2~3%를 감안하면 초저위험의 실질 수익은 거의 0에 가깝고, 20~30년 뒤 퇴직 시점에 명목상 불어난 돈의 구매력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4. 중도인출이 되는 경우 — DB와 다른 DC의 유연성
DB형은 재직 중 퇴직금을 빼 쓰려면 사용자(회사) 승인이 필요하지만, DC형은 법이 정한 사유에 해당하면 퇴직연금사업자(금융기관)가 직접 판단해서 인출해 줍니다. 무주택자 주택 구입, 전세보증금 부담,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의료비(연간 임금의 12.5% 초과), 파산선고나 개인회생 결정, 천재지변 피해 등 7가지 법정 사유가 열거돼 있어요.
이 유연성이 DC형의 장점이자 함정이기도 합니다. 주택 구입이나 전세 이사 때 퇴직연금을 빼 쓰면 당장은 숨통이 트이지만, 그만큼 은퇴 후 받을 돈이 줄어드는 거거든요. 보수적 자산배분에서 다룬 것처럼 은퇴 자산은 깨지지 않아야 하는데, 중도인출은 그 원금 자체를 깎는 행위라서 가능한 한 아끼는 게 좋습니다.
5. 퇴직할 때 — IRP 이체와 연금 수령의 세금 차이
퇴직하면 DC형 적립금은 원칙적으로 IRP(개인형 퇴직연금) 계좌로 의무 이체해야 합니다. 2022년 4월부터 시행된 규정인데, 회사에서 퇴직소득세를 원천징수하지 않고 세전 전액을 IRP로 넘기는 구조예요. 만 55세 이후 퇴직이거나 퇴직급여가 300만 원 이하이면 IRP 없이 바로 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IRP를 거칩니다.
IRP에서 돈을 꺼내는 방식은 일시금과 연금 두 가지인데, 세금 차이가 꽤 큽니다. 일시금으로 한꺼번에 받으면 퇴직소득세를 100% 내야 하지만, 연금으로 나눠 받으면 처음 10년은 퇴직소득세의 70%만, 11년째부터는 60%만 내면 됩니다. 세액공제를 받았던 금액과 운용수익에 붙는 세금도 일시금이면 기타소득세 16.5%인데, 연금이면 3.3~5.5%로 확 줄어요. 같은 돈이라도 꺼내는 방식만 바꾸면 세금이 수백만 원 차이 나는 구조라서, DC형을 잘 굴려 놓고 마지막에 일시금으로 받아 버리면 아까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