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은행이 그린 설계도 — 다층연금의 뼈대
1994년 세계은행은 노후보장을 한 가지 제도에 의존하면 그 제도가 흔들릴 때 전체가 무너진다는 문제의식을 담아 「다층연금(Multi-Pillar Pension)」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공적 연금이 1층에서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고, 기업 연금이 2층에서 그 위에 한 겹을 얹고, 개인 저축이 3층에서 나머지를 채우는 구조예요. 한국도 이 뼈대를 따라 1층에 국민연금, 2층에 퇴직연금, 3층에 연금저축을 놓았습니다.
설계도만 보면 꽤 그럴듯합니다. 문제는 각 층이 얼마나 두텁느냐,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세 층이 다 있느냐는 건데 — 한국의 경우 아직 이 두 조건 모두 취약한 상태예요. GDP로 측정하는 국가 경제의 크기와 달리, 노후보장의 크기는 각 층의 적립금과 가입률로 드러납니다.
2. 층마다 다른 크기 — 1,458조·432조·179조
2024~2025년 기준으로 각 층의 규모를 보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국민연금은 적립금 1,458조 원(2025년 말)으로 압도적이에요. 2025년 수익률이 18.8%를 기록하면서 2026년 초엔 1,540조를 넘었습니다. 가입자 2,181만 명, 수급자 723만 명 — 1층은 한국 노후보장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사람이 연결된 층입니다.
퇴직연금은 431.7조 원(2024년 말)으로 처음 400조를 넘겼지만, 가입 대상 근로자 1,309만 명 중 실제 가입자는 735만 명 — 가입률이 53%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퇴직금 일시금 체계에 머물러 있어요. 연금저축은 178.6조 원으로 가장 작고, 가입자 764만 명은 경제활동인구의 약 26%입니다. 3층 개인연금은 자발적 가입이라 애초에 빈 칸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3. 합쳐도 부족한 이유 — 소득대체율 35.8%의 현실
OECD가 매 2년마다 발간하는 「Pensions at a Glance」에 따르면, 한국의 순소득대체율(의무 연금 기준)은 35.8%입니다. OECD 평균이 61.4%이니까, 한국은 그 58% 수준밖에 안 돼요. 명목상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이 43%(2026년~)이긴 하지만, 이건 40년 풀가입을 전제한 숫자입니다. 실제로 노령연금을 처음 받기 시작하는 신규 수급자의 평균 가입기간은 20~25년이고, 그래서 실질 소득대체율은 24~25%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여기에 2층 퇴직연금과 3층 연금저축을 더해도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습니다. 평균소득자(월 300만 원)가 3층을 모두 갖춘 경우를 가정하면 — 국민연금 67만 원, 퇴직연금 30~50만 원, 연금저축 20~30만 원 — 합산 월 115~147만 원 정도예요. 은퇴 전 소득의 38~49%인데, OECD 권고 65~75%에는 한참 못 미칩니다. 그나마 이건 3층이 모두 있는 경우고, 실제로는 퇴직연금도 연금저축도 없이 국민연금 하나만으로 버티는 고령자가 훨씬 많습니다.
4. 빈 칸이 만드는 격차 — 노인빈곤율 40%
2023년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상대적 빈곤율은 39.8%로 OECD 회원국 중 1위입니다. OECD 평균이 14.2%이니까 거의 세 배예요. 76세 이상으로 좁히면 빈곤율이 50%에 달해서, 어르신 두 분 중 한 분은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이 숫자가 「3층이 빈 칸인 사람이 많다」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지금의 고령자 세대는 국민연금이 1988년에야 도입됐기 때문에 가입기간이 짧거나 아예 없는 분이 많고, 퇴직연금은 2005년 도입이라 혜택을 본 세대가 아직 소수예요. 연금저축까지 갖춘 분은 더 드물고요. 결국 40%라는 빈곤율은 3층 구조가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시간이 부족해서 세 층이 충분히 쌓이지 못한 세대가 은퇴한 결과입니다.
5. 빈 칸을 채우는 순서 — 무엇부터 해야 하나
3층 구조의 빈 칸을 채우는 데도 순서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1층 국민연금의 가입기간을 최대한 늘리는 거예요. 납부 기간 편에서 다룬 것처럼 10년과 40년의 수령액 차이가 네 배 이상이고, 추납·크레딧·임의계속가입으로 빈 기간을 메울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사실상 무위험 종신 소득이라, 같은 돈을 넣더라도 수익률 관점에서 가장 확실한 노후 자산이에요.
그 다음은 2층 퇴직연금을 방치하지 않는 겁니다. DC형이라면 원리금보장형에 전액 넣어 두고 잊어버리는 대신, 위험자산 70% 한도 안에서 TDF나 인덱스 ETF를 적절히 배분하는 것만으로도 수익률이 두세 배 달라집니다. 3층 연금저축은 여유 자금이 생겼을 때 세액공제(600만 원·16.5% 환급)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채워 나가면 됩니다. 중요한 건 세 층을 「동시에 완벽하게」 채우려 하지 않는 거예요. 1층을 최대한 두텁게 만든 뒤, 2층과 3층을 여력에 맞게 쌓아 올리는 순서가 가장 현실적입니다.